주저리 주저리

평생 살았던 곳을 떠나는 날, 부모님의 이사

베가지 2022. 12. 21. 15:17

평생을 도시 중심지와는 거리가 먼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사셨던 부모님의 이사 날

자식이 4명이나 되어도 누구 하나 올 이가 없다며

그나마 시간이 되는 내가 왔으면 하고

이사 전날 전화가 왔다.

내가 원래 심보 나쁜 인간인지라 ㅋㅋㅋ

한 번에 곱게 간다고 말하지 않았다.

사실 부모님께는 4명의 자식 중의 하나지만

내 아이에게는 하나뿐인 엄마인 터라...

천방지축으로 부모 손길이 필요한 아이가

있는 탓에 온전히 이틀의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은 게 첫 번째 이유였고,

홀로 이동하는 탓에 기차나 버스를 이용하자니

장장 편도로만 5시간을 들여서 가야 되는 거리에

사실 귀찮음이 있었던 게 두 번째 이유였다.

게다가 은근 아들 챙김이 있으신 부모님이라

천덕꾸러기 취급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던

과거의 섭섭함도 한몫했던 터였다.

남편이 부모님 이삿날 가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몇 번 물어봐도, 내 알 바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기를 여러 번이었다.

그래도 내심 걱정이었던 건,

얼마 전 발가락 골절로 다리가 불편한 엄마와

허리 수술을 했음에도 영~ 다리에 힘이 없으신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파트로 이사는 세상에 태어나고 처음이니

지하주차장 출입과 세대내 현관 출입,

월패드 사용, 보일러 작동, 하자 신청,

가스 작동, 인터넷과 TV 신청 등

자질구레하니 신경써야하는 생소한 일

천지였다. ㅎㅎㅎ

이사 전 이삿짐 확인을 해야 하는데,

다리 불편한 엄마는 마음이 급하고

아버지는 느긋하니....

속에서 천 불이 나는 건 엄마였지, 아버진 아니었을 터..

이사 일주일 전, 올 수 있냐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는

갈건지 생각해보겠다고 말했을 뿐인데,

말하기가 무섭게 다른 자식들에게

오지 않아도 된다고 전화를 돌렸단다.

생각해보겠다는 건 긍정의 의미였던가???

저녁시간 즈음의 열차를 부랴부랴 예약하고 역으로 향했다.

열차에 오르자마자 1시간 가량 꾸벅꾸벅 졸다

잠이 깨어서는 3시간 반을 말똥말똥

눈만 굴리며 컴컴해져 가는 창밖만

쳐다보았더란다. 흐음~~~

시골집에 도착하니 어느덧 밤 10시가 다 되었다.

가져갈 것과 두고 갈 것의 분류가 되지 않아

다음 날이 걱정인 터라 늦은 감이 있지만

짐 정리를 더 해보자 싶었다. 그래도 부족했다.

그 와중에 엄마는 선반위에 올려진 금반지타령이다.

'까묵지말고 챙기라~'

아침 7시 즈음 이사 팀이 도착한다는

말에 6시가 되기 전에 일어나 눈꼽을 떼고

물 한 잔 들이키며 짐들을 훑어보았다.

가져갈 짐이라고 해봐야 냉장고, 김치냉장고를

제외하면 옷장이며 죄다 버리고가니 큰 덩치는 없어도

자식이 태어나고 자란 시간과

부모님 인생의 시간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인 까닭에

이래저래 챙겨야 할 자잘한 짐이 꽤 있었다.

 
 

엄마는 이삿짐에서 세월이 잔뜩 묻어있는 물건을 빼놓고 가기를 원했고,

아버진 주섬주섬 담아놓으시고...

엄마에게 이사는 엄마의 인생 소원임과 동시에

단순히 짐과 몸의 이동이 아닌 과거의 시간과

작별을 하고자 함이 아니었나 싶었다.

고생스러웠고 불편했던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마음이 컸었던 것 같았다.

출처 : freeqration

그에 반해 아버진, 태어나서 자라고

자식까지 길러내느라 보냈던 곳에서의 시간을

떠나보내기 싫었던 게 컸었던 것 같았다.

새로 지은 아파트야 워낙 수납공간이 많으니

어디에 둘 것인지를 고민만 하면 될 문제였다.

다 들어갈 건지는 고민할 것도 없었다.

드디어 새집으로 들어간다.

이삿 날에 맞추어 배달된 침대, 소파, 거실장이

마음에 드시는지

엄마는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셨고,

아버진 새로운 공간이 어색하기만 한 모양이었다.

어느정도 짐이 정리되니

두분이 계실 공간이 썰렁하다.

TV가 떠들어지기라도 하면 좋으련만...이사 다음 날 올거란다.

그동안 시골에서 쓰던 작은 TV를 볼 생각이셨나 보다.

근데 어쩌나 케이블을 가져오지 않았네.

게다가 너무 잘 챙겨둔 TV 리모컨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가스가 설치되지 않아 난방이 되지 않고,

가스레인지도 쓸 수 없고,

커튼 봉이 짧아서 창문도 덜 가려지고,

황토 침대는 선이 짧고,

TV는 당연히 볼 수도 없고,

주방에 물은 나올 생각도 없고,

관리실에 전화했더니 점심시간이라

전화도 안 받고.

휴대폰 데이터는 이미 바닥난지 오래고...

 

주섬주섬 챙기고 뚝딱뚝딱 하다보니

TV랑 커튼 봉만 빼고 거의 정리가 되었다.

이젠 두분만 남기고 난 내집으로 향했다.

이사가 끝난 후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꽤나 많은 양이었다.

이사가 끝난 후라 다행이다 싶었다.

.

.

.

자녀가 모두 출가하고,

나이가 더 드신 후,

당신이 살던 곳을 떠나는 일은 쉽지 않다.

지인들이 지척에 살고 있다면 더욱더...

이 좋은 세상 더 살고 싶다는 어르신을 생각하면,

단독주택보다 관리하기 편리하나 생소한 곳도

더 늦으면 옮기는것도 어려웠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아프고 거동이 어려우면

아무리 좋은 곳이 있어도 가보지 못할테니 말이다.

마당이 있던 집에서의 생활과 비교하면

단조롭고 따분한 시간이 될 테지만,

제 몸 하나 가누고 건사하기 힘든데

때마다 페인트칠에 기름탱크 채우고,

홍수에 누수 걱정하고, 쌓인 눈 쓸고,

한파에 수도관 동파 걱정 등을 덜 수 있으니

좀 더 편한 생활이 될 거라 생각된다.

아이들에겐 할머니 집 불편하다고 투덜댈 거리를

하나 줄였다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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